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호 전투 (문단 편집) === 11월 27일, 조여 오는 올가미 === 중공군은 미 해병 1사단을 진흥리[* 현재의 [[삼거역]] 일대] - 고토리[* 현 장진군 남쪽 [[고토역(장진선)|고토역]] 일대] - 하갈우리 - 유담리[* [[장진호]] 서부]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유도했다. 중공군 [[쑹스룬]] 장군은 과거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을 [[유격전]]으로 농락한 [[홍군]] 출신답게 밤에만 이동하는 작전을 수립, 게다가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사용해가면서 주변 부대를 산 정상에 배치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배치된 중공군은 '''6개 사단!''' 해병대를 드디어 노리기 시작하였다. 서부전선에서 UN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11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25일 토요일 저녁. 이천우가 이끄는 중공군 13병단 18만 명이 제2차 공세를 시작했다. 동부전선에서 UN군의 크리스마스 공세 개시일은 11월 27일이었다. 26일 오후부터 미8군 산하 한국군 2군단의 전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26일 아침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10군단에 알려졌다. 동시에 한쪽 날개를 담당하고 있던 미 10군단에 대하여 쑹스룬의 중공군 9병단 12만 명 12개 사단 중 6개 사단을 장진호에 집결시켰다. '''작전은 성공했다.''' 운명의 11월 27일. [[도쿄]]의 맥아더와 미10군단은 중공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고 예정대로 동부전선에서 크리스마스 공세를 시작했다. 해병사단은 여전히 느리게나마 조금씩 진격 중이었다. 특히 5연대 2대대 소속 D, E, F중대는 유담리 서쪽으로 진출을 시작하여 미8군과 연결하기 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담리 일대는 중공군 3개 사단으로 포위되어 가고 있었다.[* 중공군 79사단이 북쪽, 89사단이 북서쪽, 59사단이 남서쪽을 담당하였다.] 또한 장진호 동쪽에는 중공군 80사단이 [[사수역]] 근방에 있던 페이스 임무부대(1개 대대)와 맥클린 임무부대(1개 대대 + 1개 포병대대)를 공격해서 역시 포위하였다.[* 원래 중공군의 계획은 중공군 58, 60사단으로 장진호 남쪽의 하갈우리를 포위하여 장진호 동쪽/서쪽과 함께 동시에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간에 산악으로 이동만 하는 중공군 특성상 이동이 지체되어 58, 60사단은 다음 날인 11월 28일에야 도착했다.] 해병대의 경우 장진호에서 북진하는 임무를 맥클린 부대 등 육군에게 넘기고 낭림산맥을 넘어 서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일단 7연대가 유담리 일대를 방어하고 5연대를 선봉으로 하여 서진하기로 하였다. 1연대는 아직 유담리까지 오지도 못하고 대대별로 찢어져서 각각 하갈우리, 고토리, 진흥리에 흩어져 있었다. 이때의 해병대는 중공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하루를 자도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 으려고 했으나 땅이 파지지가 않았다. 겨우 11월이었지만 눈과 얼음의 두께는 대략 40 cm 정도라서, 미군의 휴대용 삽으로는 불가능하고 전동착암기가 필요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부대 편성은 방어대형으로 포진하고 있었다. 27일 밤 10시부터 동부전선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어 유담리의 북쪽과 동쪽을 방어하던 3개의 중대에 큰 타격을 입었다. 먼저 사단 최북단 1403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H중대가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고 후퇴해 버렸다.[*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3대대장 해리스 중령의 너무 빠른 듯한 후퇴 명령이 아쉽기는 하지만, 다음 날 밝혀졌듯이 중대 장교 7명 중 1명만 남고 중대원은 40명뿐인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남쪽이자 장진호와 유담리 사이의 1282고지를 방어하던 7연대 E중대는 176명 중 120명이 사상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5연대 1대대의 지원으로 결국 방어에는 성공했다(중공군 79사단 235연대). 동남쪽으로 1500 m 떨어진 1240고지의 D중대도 고지를 빼앗긴 후 다른 중대가 재탈환했지만, D중대는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이후 전투불능이었다. 결국 유담리의 해병대는 포위되었다. 또한 유담리 남쪽으로 하갈우리 사이의 보급로를 지키던 터키힐[* 11월 24일까지는 7연대 B중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는데, [[추수감사절]](11월 23일) 기념으로 받은 [[칠면조]] 뼈다귀가 쌓아놓은 더미가 있어서 C중대가 '칠면조 언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개 소대가 연대 본부를 지키고 있어서 감편되어 180명 정도 있었다. 미군은 전쟁 중이라도 1년에 2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먹는 풍습이 있다.]의 7연대 C중대는 28일 새벽 2시 30분 중공군 58사단의 공격으로 사상자 60명이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그 남쪽에 위치한 폭스힐의 F중대[* 대대 중화기 중대의 81밀리 박격포팀 등의 증원이 있어 218명 주둔.]는 무려 81명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 중 사망자는 24명인데 중공군 시체는 350구 정도 널려 있었다. 폭스중대가 1/10이 사망한 데 비해 그날 공격해온 중공군 대대는 반 이상이 사망했다. 나머지 반도 부상이나 미군 포로 신세라 사실상 전멸. F중대에 대해 간단히 한 줄 썼지만 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책 <폭스중대의 최후의 결전>은 27일 밤의 전투까지가 책의 절반일 정도의 혈투였다.] 반면에 하갈우리와 고토리는 그날 밤 조용하였다. 오직 하갈우리의 포병대 H포대만 유담리 지원을 위해 불을 뿜었을 뿐이다. '''이렇게 장진호 근방의 [[미 해병대]]는 고립된다.''' 한편 11월 25일 장진호 동안에 도착한 7사단 페이스 임무부대(Task Force Faith)는 32연대 1대대를 기간으로 하고 있었다. 급편방어진지를 구축하여 하룻밤을 보냈으며, 26일 부사단장인 헨리 호스 준장이 도착하여 “하갈우리 동안의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고 현진지는 곧 도착하는 맥클린 임무부대(Task Force MacLean)에게 인수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맥클린 부대는 31연대 3대대, 57포병대대, 31전차중대, 31연대 수색정찰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곧이어 맥클린 부대가 도착했지만 해병대가 아직 철수하지 않아, 이날은 그냥 현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운명의 11월 27일. 아침 동트자마자 해병대 5연대 3대대는 서진하기 위해 모두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로 빠졌고, 그날 오후 페이스 부대가 해병대 진지를 인수하여 풍유리강 하구에 주둔했다. 이어 맥클린 부대가 페이스 부대의 진지를 인수하여 후동리에 주둔했다. 한편 27일 먼저 출발한 맥클린 부대의 연대수색대는 연락 두절되었고,[* 소대장 코크 중위. 27일 주간에 풍류리강 북동쪽 부전호 쪽 계곡을 정찰하러 갔다가 소대 전체가 전멸함. 며칠 후 후퇴 과정에 생존자 2명이 페이스 부대에 합류.] 곧 도착하기로 한 31연대 2대대 역시 연락두절이었다(예상과 달리 아직 머나먼 [[함흥]]에 있었다). 27일 야간에는 장진호 동안 후동리에 부사단장 헨리 호스와 31연대 본부, 31전차중대(전차 22대)가 주둔하였고, 북쪽 6 km 지점 풍유리강 하구에 31연대 3대대와 57 야전포병대가 주둔, 다시 5 km 올라가는 최전방에 맥클린 연대장과 32연대 1대대가 주둔하였다. 철저하게 방어 준비를 하고 취침한 해병대와 달리, 7사단에게는 그저 하루 자는 숙영지 개념이어서 방어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27일 해병대로부터 전날 중공군을 신문한 결과 "중공군 3개 사단이 지금 장진호 주변에 있고, 그들의 임무는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장진호 주변에 있는 미군을 전멸시키는 것이랍니다", "어제 저녁에 중공군 정찰대가 해병대원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라고 통보를 해주기는 했다.[* 이날 육군의 대응에 대한 증언이 엇갈리는데, 해병대 쪽에서는 “육군이 그냥 처잤다”고 하고, 육군 쪽에서는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사계 청소도 했으며, 중·소대별 사격 구역을 나누는 등 충분한 방어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일단 방어진지 자체는 미 해병 5연대 3대대의 진지를 인수 받아 이미 진지 구축이 된 상태였다.] 페이스 부대의 A중대는 북쪽을 보며 도로 서쪽을 방어하고 C중대는 도로 건너 동쪽, B중대는 도로를 따라 C중대 남쪽을 방어했다. 대대 본부는 방어진지에서 1 km도 떨어지지 않은 민가 쪽에 설치되었고, 화기중대인 D중대는 A중대 남쪽, 본부중대는 C중대 남쪽에 배치되었다. 같은 단위의 육군은 해병대에 비해 30% 병력이 적었고, 그 바람에 모든 진지에 병력 배치가 안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B중대와 C중대를 연결해주는 요지이자 주변에서 가장 높은 감제고지인 1475고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27일 밤 11시부터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북쪽에 있던 페이스 부대(32연대 1대대)는 사방에서 파고드는 중공군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 A중대와 C중대 사이 도로를 타고 북한군이 보유했던 전차 1대와 자주포 1대가 밀고 들어오기도 했다. 다행히 후방에 있던 화기중대인 D중대에서 75밀리 무반동총으로 격파하였다. 이것이 장진호 전투에서 유일한 중공군의 전차 운용 사례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A중대 후방으로 침투하였으며, C중대와 B중대 사이에 비워져 있던 1475고지를 손쉽게 점령하였고, 이곳에서 미군을 감제할 수 있었다. 또한 유선이 절단되어 있어 57포병대대에게 일체 포병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어차피 57포병대대는 제 코가 석자여서 포격 지원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맥클린 임무부대에서 배속 받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의 지원을 받으며 큰 무리 없이 버텨 나갔다. 새벽 동틀 무렵에는 페이스 부대에 배속된 전방항공통제관 에드워드 스탬포드 해병 대위의 유도 아래 제312해병전투비행대대(VMF-312) 소속 F4U-4 코르세어 전투기 4대가 도착했다. 전투기들은 [[네이팜탄]]으로 폭격하고, 5인치 로켓과 20밀리 기총소사를 퍼부어 지상부대 상황을 안정시켰다. 주간에 확인해보니 A중대에서는 중대장 스쿨리온 대위를 포함해 8명이 사망했고 20명이 부상당했다. 그 외 부대는 집계조차 되지 않았다. 페이스 부대의 선전에 비해 맥클린 부대는 파멸적이었다. 맥클린 부대의 주력인 31연대 3대대와 57 포병대대는 원형방어가 아닌 북쪽에서 내려와 급격하게 서쪽으로 꺾어지는 도로를 따라 선방어를 하였다. 동쪽 방어는 3대대 I중대가 하고 있었고, 화기중대인 M중대가 함께 했다. 중공군은 동쪽에서 무인지경처럼 밀고 들어와 서쪽의 도로변에 있던 대대 지휘소와 57포병 A포대를 유린했다. 이처럼 지휘소가 쑥대밭이 되고 지휘부가 전멸한 관계로 아직까지 그날 3대대의 진지 배치가 어땠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또한 지휘부의 전멸로 예하 중대들은 알아서 싸워야만 했다. 연대장 맥클린 대령은 전방지휘소가 있는 페이스 부대에 위치해 있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스 부사단장은 후동리에 있는 후방지휘소에 있었는데 통신두절로 지휘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급작스러운 기습에 57 포병대대는 보병부대에 대한 포병 지원은 고사하고, 몰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직사로 사격하며 중공군과 싸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때문에 바로 앞에 있던 K중대에 A포대의 포탄이 날아왔다. 이미 지휘부가 유린당한 K중대는 이때의 포격까지 당하자 할 수 없이 진지를 포기하고 A포대 후방으로 후퇴해 버렸다. 그러자 A포대도 B포대 쪽으로 향해 도망쳤다. 결국 B포대 진지에 A포대, B포대, K중대, L중대 잔여 병력이 모두 모였다.[* 왜 여기서 L중대가 갑툭튀 했냐면, 지휘부가 괴멸되어 이날 배치가 어디였는지, 어떻게 후퇴했는지 증언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를 지키고 싸우고 있는 것은 동쪽의 I중대와 화기중대인 M중대뿐이었다. M중대는 75밀리 무반동총 소대와 기관총 소대를 이미 K중대와 L중대로 보낸 상태라 81밀리 박격포 소대밖에 없었지만 누구보다 훌륭하게 싸웠다.[* M중대는 70%가 카투사였다. 그들은 밤새 진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으며, 중대장 얼 조단 중위에게 "한 사람의 군인으로 손색이 없었다."고 칭찬받았다.] 날이 밝아오자 살아남은 병력들이 3대대 지휘소를 역습하여 탈환했다. 놀랍게도 대대장 라일리 중령은 부상당했지만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러나 부상이 너무 심해 후송되었으며, 그를 제외한 대대 참모부는 전멸했다. 또한 대대에 배속된 제5공군 전방항공통제관도 전사해 앞으로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한편 1마일 후방에 있던 57포병대대 본부 및 본부 중대와 제임스 맥클리몬트 대위가 지휘하는 15대공포대대 D포대는 전방의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협곡의 구조 때문에 이들에게는 북쪽의 전투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남쪽의 의무중대가 전멸하는 상황 역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28일 새벽부터 박격포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반격을 하였는데 D포대의 2연장 40밀리 보포스 포 화력이 너무도 절륜하여 사격 시작한지 단 몇 초 만에 전방에서 더 이상 움직이는 물체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 받았던 박격포와 소화기 사격에 의해 57포병 대대장 엠브리 중령은 부상당했으며, 부대대장 모리스 소령은 전사하는 피해를 입는다. 이에 지휘권은 작전장교 톨리 소령이 인수받았다. 맥클린 부대가 첫날에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남쪽 후동리 방향으로는 공격이 가해지지 않아 완전한 포위망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동리에는 22대의 전차들이 있었는데 이 때문인지 후동리는 전혀 공격이 없었다. 문제는 연대의 31의무중대가 밤중에 후동리에서 31연대 3대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1221고지에서 매복에 걸려 중대장 이하 전멸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1221고지는 장진호 동안 에서의 중요한 목진지이며, 이곳을 방어 부대 없이 놔둔 것이 당장 보면 31의무중대의 전멸이고 길게 보면 이후 장진호 동안의 육군 전멸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장진호 서안의 [[미 해병대]]는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의 목진지에 터키힐과 폭스힐이라는 명칭을 각각 붙이고 1개 중대씩 배치하였다. 이는 이후 유담리의 [[미 해병대]]가 하갈우리로 후퇴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그에 반해 장진호 동안의 육군은 풍유리와 후동리 사이의 1221고지가 중공군에게 장악당한 상태라 이후 풍유리의 육군이 후퇴하다가 1221고지에 걸려서 작살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